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14연대 창설 ==== 해방정국 당시 군에는 크게 3개의 좌파 조직이 있었다. 박정희가 총책이였다. 하나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 남로당 지방 도당에서 관할하는 병사들의 조직인 ‘병사 소비에트’, 마지막으로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북로당(북한 [[조선로동당]]의 전신)이 [[경상남도]] 일대에 조직한 ‘인민혁명군’이다. 남로당에서 군 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조직을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장교들의 인사행정은 모두 서울에서 하며 인사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한다. 그러나 사병들의 경우 지방에서 모집하고 인사이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방당에서 관할한다. 1. 서로 선을 다르게 하면 보안상 유리하다. 이 때문에 남로당은 장교 조직과 병사 조직을 별도로 조직, 관리했으며,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는 같은 부대 소속임에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 조직인 인민혁명군은 무려 1,593명에 달하는 지하세력으로 콤 서클, 병사 소비에트와 달리 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런데 일선 행동대가 상부의 지령도 받지 않은 채 임의로 ‘[[대구 10.1 사건]]’에 편승하였다가 일망타진되어 47년 초 붕괴되었다. 북로당의 침투에 반발한 남로당 측에서 인민혁명군 조직을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에 제보했다는 설도 있다. 인민혁명군이 붕괴되자 북로당 조직부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내무국 정보처에서는 강진을 대표책임자, 정보처 요원 김일광을 실질적 총책으로 한 제2차 인민혁명군을 조직하려고 한다. 이들은 주로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경찰 관계 세포조직을 내선으로 하고 남로당에 포섭되어 있지 않은 사회주의자와 그밖에 청년단체 계통 조직선을 외선으로 한다. 여순사건의 두 주역인 4연대 정보과 선임하사관 지창수 상사는 ‘병사 소비에트’에 소속되어 있었고, 김지회 중위는 [[북한]]의 [[평양시|평양]]학원 대남반 출신 공작원으로,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에 입교한 북측 공작원이다. 김지회가 ‘콤 서클’에 침투 할 때는 좌파장교들은 그를 남로당으로 알았고, 병사 소비에트는 김지회를 우익 장교로 알았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였다. 김지회는 국방경비사관학교 시절부터 교육생들을 콤 서클로 포섭하였고, 1연대 2대대장 부관을 거쳐서 전남 [[광주광역시|광주]]에 창설된 제4연대로 전속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2차 인민혁명군의 실질적인 총책인 김일광에게서, 김지회 중위가 이끄는 콤 서클을 인민혁명군과 합작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여기에 부록으로 평양학원 항공중대를 졸업한 공작원 최일주 일병이 김지회의 당번병 명목으로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 김지회의 연락책 겸 감시역이였는데, 여순사건 초기때는 김지회는 배후에서 지휘하고 최일주가 대신 ‘병사 소비에트’를 지휘했다. 정리하자면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는 남로당 계열이었고, 적색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도 자신들을 남로당 중앙당 소속으로 알고 있었으나 북한 공작원인 지휘관 김지회 중위에 의해 ‘인민혁명군’으로 소속이 변경되게 된다.[* 곧이어 제2차 인민혁명군마저 미군정청의 경무부가 일망타진한 덕택에 다시 붕괴된다. 이때 총책 강진이 검거되는 바람에 김일광이 대신 잔여 세력을 지휘하게 된다.] 김지회와 지창수가 소속된 제 4연대는 [[영암사건]]이 발생했던 그 부대이지만 사건에는 크게 휘말리지 않았고 각자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를 순조롭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자의 상부 조직을 통해 새로 여수에서 창설되는 14연대로 이동하여 혁명군 조직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4연대에서는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14연대 기간병으로 보냈는데, 이에 이미 김지회와 지창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연대 지휘부에서는 불온사상 때문에 평소에 골치를 앓아온 터라, 평상시에 불온했던 다수의 병사들을 14연대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48년 5월 초, 14연대가 창설되고 김지회는 신설 14연대 작전참모 보좌관, 지창수는 연대 본부 선임하사관격인 연대 인사과 선임하사관, ‘병사 소비에트’ 부책인 정낙현은 연대본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라는 요직을 죄다 차지하였다. 그리고 14연대는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였는데 주로 전남 동부 [[곡성군]], [[구례군]], [[순천시|순천군]], [[광양시|광양군]], [[보성군]], [[여수시|여수군]], [[고흥군]] 등에서 모집했다. 이 때 지원자가 부족한 탓에, 불온사상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원자는 무조건 입대시켰다.[* 반공이 국시로까지 자리잡기 전이었으며,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도 딱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입장까진 아니었다. 그저 [[김구]], [[이승만]] 등 해방 이전부터 반공성향이 강한 인물들의 영향력이 행정부에 미쳐 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각 지방에서 좌파운동을 열렬히 하던 청년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면 14연대에 입대하기 일쑤였다.[* 14연대 뿐 아니라, 이런 청년들이 군부대에 입대하는 일이 흔했다. 지금도 군인이 민간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군 헌병대로 이첩되는데, 당시 철통같은 경비를 서는 군부대로 입대하면 말그대로 행방이 묘연해질 뿐더러, 건국초 대한민국은 군대와 경찰이 서로 총질까지 해댈 정도로 밥그릇 싸움이 심했기에 입대 사실을 알아도 경찰이 어찌할 수 없었다.] 남로당 전남도당 군사부에서도 예하 군당에 비밀 지시를 내려 좌경청소년들을 14연대에 되도록 많이 입대시키도록 독려하였다. 또한 각종 범죄자들도 군에 가면 무사하다는 소문을 듣고 경찰들을 피해 입대할 정도였다. 사실 국방경비대는 건군 초기부터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미군정]]이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이때 4연대에서는 군인들에게 [[VS놀이]]형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승만과 [[박헌영]] 중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한 설문이었다. 여기에서 박헌영을 택한 군인들만 추려내서 그들로만 14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입대에 있어서도 사상검열 등은 전혀 없었고 충성서약과 [[신체검사]], 구두시험만으로 선발하였다며 입대 절차가 너무나 허술했던 것으로 회고하였다.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80602&bbs_id=BBSMSTR_000000000228&parent_no=1|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765>老兵이 걸어온 길-15-숙군이 뜻하는 것]] 여순 사건 직전 김지회의 14연대 ‘콤 서클’에는 김지회, 홍순석, 배명종, 정영길, 김남근, 신일수 중위등 주로 경비사관학교 3기들이 소속되었고[* 14연대 3개 대대장은 경비사관학교 2기] 4연대 역시 비슷한 규모였다.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에는 약 80명의 하사관과 병이 소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